자기(Self)에 대하여
자기의 설명은 쉽게, 그리고 아주 어렵게도 할 수 있다. 누구나 노력만 한다면 개념적 이해는 하겠지만, 자기실현의 정도에 따라 이해와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분석심리학은 심리치료의 방편으로 쓰일 수 있는 수준과, 자기수행의 방편으로까지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이 있다. 전술한 아니마/아니무스는 초기의 자기수행, 자기는 보다 깊은 자기수행에 속한다. 본 블로그에서는 가급적 쉽게 자기를 설명해 보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자. “당신은 참된 자기(Self)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참된 자기로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다. 안정적 직업을 찾다가 공무원이 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하는 일의 전반은 매뉴얼에 따라서 한다. 그렇게 십 수 년을 살다보니, 어느덧 그의 삶 자체가 매뉴얼처럼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그리워하는 삶은 예술가가 되어 작품 활동을 하는 일이다. 이처럼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삶, 영원한 마음의 향수 같은 삶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것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양한 것들이 하나를 향하고 있음을 융은 발견했다. 융은 이를 자기(Self)라고 했다. 앞 철자를 대문자로 쓰기에 참된 자기라고 해야 정확한 의미가 통하지만, 융 심리학의 관례에 따라 자기라고 하겠다. 자기는 정신의 중심에 위치한 원형중의 원형이다.
융의 자기는 유사정신, 말하자면 정신의 세계를 넘는 어떤 영역에 속한다. 그러면서 의식과 무의식이 합쳐진 곳의 중심이고, 정신전체의 컨트롤타워이고, 자아에 영향력을 미쳐서 개성화를 촉진시키는 초월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 한 사업가가 있다고 하자. 인생 후반기에 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화가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의 생각은 여러모로 비현실적이고 그가 속한 집단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너 미쳤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큰 힘에 끌려 꼭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감에 사로잡혔다. 사업장을 해체하고 화가의 길로 나섰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게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여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바로 자기의 초월기능이 작동한 것이다. 이런 분들은 우리들 주변에 많다.
아직은 말하기 이르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의지를 보자. 실패로 끝난다면 많은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이 뜨거운 감자를 역대 어느 대통령도 구체화, 현실화시키지는 못했다. 정치적 실익을 저울질 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행보는 정치적 계산을 넘어 오로지 민족의 화해와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분석심리학으로, 자기의 구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 혹은 개인의 내적 변혁은 자기의 발현으로 성취되고 인류사에 기여한다.
이해를 보다 깊이 하기 위하여 융의 사례를 들어보자.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이후 심각한 정신적 고뇌에 빠졌다. 이 고뇌와 사투하면서 자신의 무의식 깊은 층에 무엇이 있는지 면밀히 탐색했다. 꿈과 환상의 분석, 그림 그리기, 요가와 명상 등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이후 5년 째 되는 해(41세)까지 이 작업을 했는데, 주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수준까지 머물렀다. 도대체 정신의 연속체인 원형과 영의 세계의 끝은 어디까지 인지, 그는 씨름했다. 그 결과 정신의 전체성(wholeness)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설계하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융은 과학적 심리학자들이 들으면 비웃을 정도의 신비체험을 한다. 이 신비체험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자기이다. 그의 신비체험은 자기를 발견해 내는 일에 기여했고, 심층심리학의 탄생으로 인류의 정신적 성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융이 그랬듯이 반드시 심각한 고뇌가 뛰 따른 후에야 자기는 분화된다.
융은 습관적으로 아침마다 원이나 사각형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을 성찰했다. 이렇게 하고나면 집중력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한 날이면 원이나 사각형의 그림이 균형이 잃기도 했다. 나중에 융은 티베트 밀의 종교에서 수행의 방편으로 그리는 만다라를 보았는데, 만다라는 그가 그린 그림과 일치했다.
자기는 최고의 원형으로서 형태가 있을 리 없으나, 주로 사각형이나 원으로 구성된 만다라 문양에 투사되기에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만다라는 자기표상이다.” 만다라는 개별과 조화라는 두 가지 특성으로 구성됐다. 수행자는 홀로 그리고 집단으로 만다라 그리기 작업을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거나 도의 경지에 이른다. 융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자아가 긴 작업 중에 자기와 가까워진 것이다. 필자는 융 수업에서 만다라 도안에 색칠하기를 가끔 한다. 이런 단순한 작업을 통하여 수강생들은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하나로 모아지는 경험을 한다.
중년기 개성화의 길에 이른 분들이 꿈속에서 보는 사각형이나 원형의 사물은 자기의 상징인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 불교인에게는 부처, 그 밖에도 인류사에 공헌한 현자는 자기원형이 상징화된 인물이다. 그 밖에도 숫자 4와 관련된 상징, 보석, 교회, 선박과 컨테이너, 나무, 꽃, 산, 호수 등도 자기의 상징물이다. 꿈에 만나는 자기원형은 누미노제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비교적 실현 가능한 자기의 상징으로 나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부모, 삼촌, 왕, 여왕, 왕자와 공주도 자기표상이다.
융은 그의 저서 “아이온”에서 자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기는 개인적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이거나 신화적 주제로만 나타날 수 있다.
◈자기의 상징은 최저부터 최고까지 범위가 넓다.
◈자기는 전체성과 동등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기가 실현되면 의식 안에서도 전체성이 실현되어 이해하고 수용하는 범위가 넓어진다. 전체성이란 더는 분열되지 않는 통합된 상태이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두움, 천사와 악마, 정의와 불의, 이러한 대극이 자기 안에서 전체성(혹은 전일성)을 획득한다.
◈신의 형상은 자기의 인(印)이다.
◈자기는 대극을 포함하고 역설적인 도덕률과 초월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는 원형들의 중심, 심리질서의 원형, 성격의 전체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기는 자아인식의 최고형태를 가진다.
자기는 자신 안에서 전체성의 상징을 산출하고, 위에 열거한 자기표상으로 투사된다. 이럴 때에 자아는 매우 특별한 정동체험을 한다. 이 밖에도 융은 도형을 그려가면서 자기를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의 저서 “아이온”을 참조하기 바란다.
개성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아니라, 자아가 아니마/아니무스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원형을 의식으로 통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도 자아가 자기와 동일시하는 자아팽창은 마성인격을 초래하니 조심해야 한다.
분당심리상담치료 가나심리치료연구소 박성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