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후에 뒤따라오는 감정의 찌꺼기는 왜 생기는가? 인간관계를 힘들어 하는 사람이 정작 힘들어 하는 것은 만남 그 자체보다도, 만남 후에 뒤따라오는 감정의 찌꺼기 때문이다. 대인공포증은 이런 감정의 찌꺼기를 처리하지 못해서, 그 찌꺼기가 자아를 사로잡아서 생긴다. 감정의 찌꺼기는 의식적 자신의 역할과,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억압한 무의식적 욕망이 서로 갈등하면서 생긴다. 의식적인 역할, 즉 사회가 그에게 부여한 신분을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페르소나는 라틴어로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연극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썼던 역할가면이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역할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가면이다. 융은 페르소나의 두 원천에 대해서 말했다. 하나는 사회의 기대와 요구에 맞추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본인이 원하는 사회적 목적과 열망이다. 이 두 원천의 타협에 의해서 다양한 페르소나가 발달한다. 가령 직업이 교사인 남성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학교에서는 교사 페르소나, 집에서는 남편 혹은 아버지 페르소나, 친구들 관계에서는 친구 페르소나, 박사학위 과정의 대학원에 가서는 학생 페르소나를 가진다. 융은 페르소나를 다양한 환경에서 적응하게 하는 “적응원형” 혹은 “외적 인격”이라 했다.
그럼, 페르소나는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에 비해 더 잘 발달시킬까? 맞다. 외향적인 사람은 별 혼동 없이 정신에너지를 대상에 투여하여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간다. 외향적인 사람이 적응을 더 잘 하는 이유다. 반면에 내향적인 사람은 정신 에너지가 대상에게 투여되나, 그 에너지는 다시 내부로 들어온다. 그에게 대상은 외부에도 있고 내부에도 있다. 그들은 대상들과 복잡한 관계가 되고 역할혼동을 가져온다. 위 교사가 내향적일 경우 자신의 역할을 교사로 보는 것과 학생들과 동등이 여기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자칫 참교육 실천가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이들은 개인적 능력이 중요한 전문직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페르소나는 착용하는 제복과 같은 것이지, 인간성이나 인격 자체는 아니다. 융이 경계한 것은 페르소나와 자아의 동일시이다. 위 교사가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가정에서도 선생이 되어 가족들에게 스트레스를 줄 것이다. 그는 친구를 만나도 가르치려 할 것이다. 공부하러 가는 대학원에서도 배우기보다는 가르치려할 것이다. 특히 명망 있는 페르소나일수록 더 두꺼워 자아와 동일시되기 쉽다. 교수라고 인간성이 교수가 아니고, 판사라고 인간성이 판사가 아니고, 성직자라고 인간성이 성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잘 페르소나를 그들 자신과 동일시한다. 페르소나에는 유연성이 있어서 상황에 따라 바꾸어 쓰되, 역할이 끝나면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페르소나는 자기에게 적합한 페르소나와 부적합한 페르소나가 있다. 전자는 융의 4가지 심리기능(사고와 감정, 감감과 직관)중에 우월 기능을 페르소나를 발달시킨 것이고, 후자는 열등기능을 페르소나로 발달시킨 것이다. 부적합한 페르소나는 꿈속에서 알몸으로 등장한다. 융은 어른의 페르소나를 거부하고 어린이로만 있으려는 사람을 “영원한 소년”이라고 했다. 네버랜드neverland에서 살고, 이성애를 거부하고,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다니는 피터팬이 바로 “영원한 소년상”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앉아있지 못하고, 인내심이 부족하고, 주위에 무관심하며, 쉽게 권태를 느낀다. 연령에 따른 현실감이 없어 보이고, 앙큼하고 어두움 면은 보이지 않으나, 공상적이 도피에 빠지기 쉽다.
그림자
다음은 그림자로 넘어가자. 페르소나는 그림자(shadow)와 교환한다. 위 교사의 경우 사회가 원하는 교사상, 그리고 그가 원하는 교사상을 발달시키려면 교사상이 아닌 것은 무의식에 억압해야 한다. 신중성은 살리고 충동성은 억압하고, 성실성은 살리고 게으름은 억압하고, 합리성은 살리고 비합리성은 억압한다. 이 때에 충동성, 게으름, 비합리성은 그의 무의식에 그림자로 억압된다. 그림자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인격의 어두운 부분”이다. 두꺼운 페르소나일수록 그림자는 진하다.
그림자를 어떻게 대할까? 그것은 잘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가 그림자를 인식해야 한다. “아, 나에게도 충동성, 게으름, 비합리성이 있었구나.”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 충동성, 게으름, 비합리성을 그림자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요소를 가진 사람을 또한 미워한다. 이것을 그림자 투사라고 한다. 융은 싫어하는 사람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라 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모습은 내 안에 있는 나의 그림자이다. 당신은 탐욕적인 사람을 미워하는가? 탐욕성은 당신의 그림자이다. 당신은 화 잘 내는 사람을 미워하는가? 화는 당신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를 인정하면 자기 및 타인에게 관대해져, 세상이 다 편해진다.
그림자는 고유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충동성에서 추진력이 나오고, 게으름에서 치유가 나오고, 비합리성에서 모험심도 나온다. 이처럼 그림자는 인정받을 때에 본래의 잠재력이 의식화된다. 그림자를 완전히 외면한다면 삶은 보여주기에 적당할 수 있다. 반면 아주 불완전하고 억압적이 된다. 그림자를 경험할 여지를 둘 때에 도덕적 종교적 갈등이 있겠지만, 개성화의 목적인 전일성(wholeness, perfect가 아님) 을 향해 나갈 수 있다. 모범적으로 살면서 자신의 진실성을 억압하는 것보다, 질타를 받더라도 그림자를 살려내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성장의 길이다. 물론 모든 그림자는 자아의 여과를 거쳐 사용된다.
개성화(Individuation)의 관문은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이다. 융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잘 인정하지 않기에,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고 했다. 나는 내 학생들에게 그림자를 발견하는 방법을 제시해 봤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세요. 그들은 당신의 그림자를 말해 줄 겁니다.” 그러나 다들 싫다고 했다. 자기만 알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꿈에 나타난 동성인물은 꿈꾼 사람의 그림자 특성이고, 동물은 그림자의 상징인 경우가 있다. 꿈의 의미를 잘 생각해 당신의 그림자를 발견하라. 다음은 융의 말이다.
“그림자를 형성함이 없이 어찌 우리는 내용이 풍부한 인간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에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어두운 그림자의 측면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은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드물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 긍정적인 것도 그림자가 될 수 있다. 이 경우에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것을 상대에게서 보고 좋아하거나 이상화한다. 대표적으로 학창시절의 단짝이 여기에 속한다.
